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문단 편집) === 튀빙겐 시기 === 1788년, 18살의 헤겔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나 [[튀빙겐 대학교|튀빙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부의 엄격한 규율과 낮은 수준의 강의는 헤겔로 하여금 수업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위로가 되는 건, 그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적으로 입학했으며 훗날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는 [[프리드리히 횔덜린|횔덜린]]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2년 뒤엔 5살 어린 천재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셸링]]이 입학했고, 셋은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면서 금새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와 자발성을 강조하는 [[임마누엘 칸트|칸트]]류의 철학에 마음을 뺏겼다. 이윽고 이들은 목사를 포기하고, 서로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2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에서 왕정이 폐지되자, 소식을 들은 셋은 놀람과 기쁨에 가득차서, 근처 들판에 혁명을 기념하는 "자유의 나무"를 세우고는, 그 주위를 돌면서 프랑스 혁명의 춤인 카르모뉼을 추고 〈마르세예즈〉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수없이 반복되면서 헤겔-횔덜린-셸링 신화의 일부가 되었으나, 헤겔의 전기작가 테리 핀카드는 이 일화는 아쉽게도 셸링이 〈마르세예즈〉를 번역했다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거짓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44 참조)] 혁명에 고무된 신학생들은 혁명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정치 모임을 만들었고 신학교는 곧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가들의 양성소가 되었다. 헤겔도 그 정치 모임의 회원이었다. 하지만 당국이 탄압하자 정치 모임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졌고, 헤겔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단지 "계몽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실천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목사를 포기한 헤겔은 1793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이후 [[베른]]과 [[프랑크푸르트]]를 떠돌면서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가정교사는 귀족으로부터 하인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헤겔은 곧잘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헤겔은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헤르더]], [[장 자크 루소|루소]], [[바뤼흐 스피노자|스피노자]] 등을 읽으면서 앞으로 펼쳐질 자신만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한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권리를 도출해냈지만, 그걸 바탕으로 독자적 자유를 얻게 된 개인은 도리어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게 되면서, 공동체는 오히려 개인의 직업과 이익에 따라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사고와 감정적 행동의 불일치는,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인 권리가 '내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변환되지 않아서이다. 그렇기에 헤겔은 개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이렇게 파편화된 사회를 하나로 뭉치는 '정신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헤겔은 그 답이 "교양 Bildung"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양은 '수동적인 교육'과 구별되는 것으로, 교양은 '자기 비판'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교양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충격적인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양인이 되는 것은 출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끌고 만들어 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족, 심지어 부르주아까지도 부정하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상ㅡ 즉, '교양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부정)하는 것'으로서의 교양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즉, 교양은 합리적 이성으로 추론한 객관적 이념이, 개인 각각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따르는 주관적인 내면화로 일치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판(부정)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헤겔은 당시 새로운 학문을 신설하고 가르치는 "대학"만이 이러한 교양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학문을 '비판적(부정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주관과 객관, 특수와 보편, 실천과 이념 사이의 모순을 매개하고 일치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